메뉴 건너뛰기

         자유 게시판(Freeboard)

 

Cubisme이 현대 회화에 끼친 영향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board02.png

 

  큐비즘은 1907~14년에 걸쳐 파리를 중심으로 해서 전 세계적으로 확산된 藝術運動으로 1908년 마티스는 당시 조루주 브라크가 깜짝 놀랄만한 세잔느 풍의 그림을 보고난 후, 야수파에 마지막으로 매료된 브라크가 “단지 작은 튜브들만 구성된 그림을 그렸다고” 평론가 루이 보드셀에게 불평함으로 해서 큐비즘이라고 알려진 중대한 현상에 명칭을 부여하게 된다. 1908년 브라크는 실험적 노력, 충격적 에너지와 神적인 創造力을 지닌 피카소를 만나게 됨으로써 공동작업에 들어가게 된다. 이것이 바로 큐비즘이 거의 반세기 이상 현대 미술의 필수 불가결한 랑구아 프랑카(혼성국제어) 로 만들게 된 것이며, 이들 두 화가에 의해 르네상스 이래 100년간 지속 되어진 遠近法이 파괴되고 공간을 새로운 방식으로 재인식하게 된다.

 

큐비즘의 실험적인 방법에 의거하여 인간 지각의 빈틈없는 예민한 파악력을 반영함과 동시에 피카소와 브라크는 새로이 감지된 4차원 즉 시간을 적정된 회화의 세계로 도입한 것이다. 큐비즘은 그림의 여타 측면을 실현하기 위해 그 형상을 잘게 나누어 통일한 빠삐아 꼴레와 같은 평면적 구성으로 분할하기 시작함으로써 外的 實際의 법칙보다는 회화의 內的 法則에 더욱 충실한 구조로 그 단편들을 전환 시켰다. 이로써 브라크와 피카소는 큐비즘을 客觀的이고 構成主義的인 抽象의 형태로 전환 시키기 위한 단계를 만들어 나갔다. 그러나 야수파가 보다 주관적인 작가들의 순수한 색체 추상으로 확장하게끔 허용했듯이 큐비즘의 개척자들은 자신들의 예술이 감각적 세계와의 연관을 끊어 버리기에는 너무나 "人間的인 체취에 흠뻑 젖어 있음을 발견했다“ 그러므로 피카소와 브라크에 의한 큐비즘의 회화는 2차원적 표현 이라는 하나의 객체로서의 자율성과 3차원적 관찰 영역에 대한 암시 사이에서 배회하며 야수파의 낭만적 直觀에 대한 合理的이면서도 古典的인 代案으로서의 명성을 넘어 데 스틸의 유토피아적 열망에서 부터 초현실주의자 들의 정신적인 꿈에 이르는 모든것을 표현할 수 있는 유연성과 힘의 언어가 된다.

 

  초기의 큐비즘은 꼴라쥬 기법으로 이루어진 레몬, 오이, 유리컵, 파이프 등의 까페 정물 장면에서 피카소는 짜여진 등나무 의자의 무늬가 인쇄된 유화 천조각을 부착 함으로써 전통적 방법을 사용함이 없이 의자의 존재를 시사해 주며 후에 피카소는 여기서 한발자욱 더 나아가 그의 꼴라쥬에 실제의 오브제나 오브제를 의미하는 오브제적 일부도 도입하게 된다. 이러한 기이한 착상은 큐비즘을 변형 시키게 되고 20세기 미술의 새로운 根源의 하나로 이루어 진다. 따라서 큐비즘은 오브제라는 새로운 미술 材料로써 이용되기 시작하여 1913~14년 동안에 수많은 화가들이 큐비즘의 문화로 들어오기 시작하여 오브제가 가지는 同時性에 대한 새로운 경향의 착상을 회화, 문학에도 적용시킨다. 이러한 전후인 15년경의 피카소의 걸작인 '테이블에 기대고 있는 남자'는 후기 “종합적 큐비즘"을 낳게되는 계기가 된다.

 

  결론적으로 큐비즘은 20세기 미술에 화면의 平面性과 더불어 光에 의한 고유색의 발견과 20세기 미술의 사물에대한 直觀(선)을 부여하게 되며, 르네상스 이래로 쓰여져오던 空間性에 대한 문제인 遠近法의 파괴는 기존의 형태를 파괴하게 되므로 해서 自然에 대한 새로운 認識을 불러 일어키게 하였다. 또한 1907년 베르그송의 저서 ;창조력의 진화'를 통해 설파한 인간 기억의 축척적 특성 이라는 개념이나 12년에 아뽈리네르가 주장하는 ”신비주의적인 同時成에 대한 문제는 현대 재능있는 화가들이 달성하고자 하는 목표중의 하나로 이야기 되어진다.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