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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 유 앨 범(Free Alb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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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상파 : 빛과 분위기의 화가들

        이것은 印象主義 그림으로 이 시대 최고의 걸작품의 하나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1877년에 처음 그것을 보았을때 그 화가는 불완전 하거나 나쁜 눈을 가졌다고 생각 했다.  또 비평가들은 어린이들이 종이 위에 자기들 마음대로 즐겁게 색칠한 것이 오히려 印象派 畵家들 보다 났다고 혹평했다.   1세기 전 즉 그랜트 대통령, 빅토리아 여왕, 프랑스 제3공화정 초기와 동시대의 사람들은 앞장에 보이는 에릭과 쉴러에 의해 아마 그림의 寫實性을 이해 했으리라 본다. 그러나 그들은 Auguste Renoir에 의하여 그려진 印象主義 그림에 의해 당황하게 되었다.    印象主義는 논리적으로는 寫實主義에서는 탈피했으나 寫實에 있어서는 印象派의 그림들 특히 야외장면, 풍경, 또는 가든 카페와 같은곳에 나타나는 희미한 빛에 의하여 창출되는 순간적이며 일반적인 인상에 사로잡힌 사실주의의 일종이었다.    여러분은 독창적인 것이나 적어도 色의 재생을 보아야 하고, 인상파 그림을 이해하며 보아야 할것이다.  심지어는 검은색과 흰색의 재생에서도 여러분은 사람, 의자, 나무의 형태들이 날카로운 가장자리 또는 어두운 그림자의 섬세함도 없이 가벼운 터치로 희미하게 그려서 모든것이 혼동되어 있는것을볼 수 있다. 이것은 자연적으로 사람을 흥분하게 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인상주의 화가들이 익숙해 왔던 세밀한 묘사를 도둑질해 갔다고 느꼈으며 그사람들은 인상파 화가들이 검은색 코트 대신에 초록, 오렌지, 보라색을 사용하여 더 정확한 효과를 나타내는것을 보았을때 더 화가났다.    인상주의 자들의 들라크로와와 같은 늙은 畵家로 부터 영향을 받고, 민감한 正直性을 가진 자신의 눈을 사용하여 모든 빛에는 색깔이 있으며 노랑 태양빛은 상징적인 푸른 그림자를 創造하기 때문에 自然에는 검은색이 없다고 관찰했다. 科學者들은 이미 이 사실을 발견했으며 결국 대중 자신들도 푸른 그림자를 인정하게 되었다.  인상주의 자들은 그들 스스로의 자유로운 것과 뒤의 대중들이 그림은 自然的 상세함과 색깔의 글자 그대로의 모방이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부터 매우 중요한 승리를 얻었다.  

  • OP ART

      시력의 또는 시각의 표현은 일반적으로 눈의 오류에 빠지기 쉬운 것을 탐험하기도 하고 개발하기도 하는 이-삼차원의 일들에 적용되고 있다. 여기에 적절한 오직 다른 종합화(일반화, 보편화)는 모든 Op Art들이 추상적이고, 특별히 형식적이며 엄격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술에서 순수한 감각의 최고를 성취하기 위해 말레비치의 목표의 본질과 구성주의의 발달로서 보여질수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바우하우스에서 개발되었던 이념들에 의해서, 그리고 Moholy-Nagy와 Josef Albers의 이념들에 의해서 영향 받게 되어졌던 경향으로써 보여질 수 있었을 것이다.   Responsive Eye 전시(1965년 2월 뉴욕 현대 박물관에서 개최되고, 시각적인 그림들중에서 탁월성을 지닌 최초의 국제적인 전시)의 조직자(창립위원)인 Willion Seitz는 1962년 이래 이와 다르면서 가까운 종류의 언어들을 생생하게 기록했던 지각있는 반응을 발생시키는 사람으로써 OP art 와 관계해 왔다. 이것이 그림자체로 눈 또는 뇌의 행동적인 신체구조에서 일어나는 것인지 어떤지 간에 관람객에게 착각하기 쉬운 이미지와 감각들을 자극한다는 것은 특별히 동적인 질을 필요로 한다. 그렇게 해서 어떤사람들은  OP ART가 환상으로 매우 기초적이고 중요한 방식으로 다룬다는 것으로 유래를 밝힐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어떤것은 모든 예술이 얼마간의 범위까지는 환상에 포함되어졌기 때문에 보다 더 특정적이다. 환상은 마음의 눈으로 이미지를 완성하기 위해서 이전 경험을 바탕으로 관람객의 재능을 이용한다. 게다가 상상은 2차원 유화의 논리력을 패배시키기 위해 자극을 주는 것에 의한 과정이다. 이것은, 예를들면 Trompeloeil과 같은 경우이다, 그러나 OP ART의 기간은, 시각의 평범한 과정들이 주로 일의 시각적인 현상들을 통하여 의혹속으로 빠져들었던 환각의 유형에 충당되었다.   OP ART 라는 이름은 1964년 가을 이래로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다. 새로이 이름 지어진 운동들이 색채를 탐험하는 일이나 애매한 관계들과, 실재로 어떤 그림이라도 알브스가 ‘신체적인 사실과 정신적인 효과 사이에서의 모순’ 처럼 묘사되었던 것과 같이 다루는 일에 막연히 적용되었던 것은 특별히 활발 기간 동안에 생겼다. 미국에서 돈을 벌게 되었던 OP ART는 1964년 10월 Time 잡지에서 최초로 언급 되어졌다. 그리고 두달 후 Life에서 특정적인 모습을 띄게 되었다. 1965년경 OP ART도 영국과 미국에서 흑백으로 대담하게 모방된 구조들과 창문 전시, 일반적으로 실용적인 대상으로 까지 가정적인 말씨들로 언급되고 있었다. 운동의 독특한 견지에서 두 정면에서 거의 동시에 일어나는 출현이었다. OP ART의 선조들은 지각있는 예술의 특색으로서 전형의 분야에서 가능한 한계선까지 운송하는 것인데 인상파 화가들과 후기 인상파 화가 들이다. (Seuvat가 명백한 예로서 보여짐) 인상파 화가들이나 후기 인상파 화가들은 말투와 색들의 시각적인 혼합을 표현는 원형으로서 고용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또 조색판을 사용하는 혼합의 방식을 저버리고 눈이 상당히 먼 거리에서 순수한 점들을 혼합하는 것을 내버려 두었다 그들의 그림에서 막연한 형식들은 관람객들이 적당한 위치까지 뒤걸음걸이를 할때 상징적으로 뿐만아니라 색채적으로 그들 자신들을 변형 시킨다. 반면에 점묘법 화가들의 기술은 1888년대에 Seuvat Signac Pissavro 와 Cross와 같은 화가들을 위한 창조적인 접근이었다. OP ART의 기술적인 면들은 이러한 기술이 사실상 지배받는 물질이 되어왔고, 사실상 그림의 기초적인 내용이 되져 왔던 현대의 그림들에서 지금 잘 알려진 것으로 밣혀졌다 그렇게 해서 이러한 특성들, 기법 그리고 지배적인 물질들은 종합적으로 분활할 수 없다.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 특별히 다수 형식의 개별적인 선에서 1960년까지 대충 거슬러 올라갔던 OP ART 운동의 개발에서 가장 직접적인 영향과 일들은 조셉 알브스와 빅토르 Vasarely의 이론 들에게서 찾아지고 있다.   그가 색체에 대한 그의 유명한 강습회가 개최된 장소인 Bauhaus. Balck mountion Colleg와 Yale 에서 가르침을 받은 알브스는 색채의 사용을 포함하는 어떤 일이 친척 관계에서 경험적인 학문이라는 사실을 항상 강조해 왔으나. 그 진술은 그 자체에서 어떤 방식으로는 혁명적인 것이 아니다. 그러나 알브스는 어떤 다른 살아있는 예술가보다도 더 성공리에 이 분야를 탐험해 왔다. 그리고 'Homage(존경) to the square(정방형)'라고 불리는 그림들의 시리즈 속에서 다양한 상호의 영향을 통하여 색깔과 색조의 불안정성과 관련성의 모든 뉘앙스(색조)를 꾸며왔다. 그는 색깔이 어떻게 해야 남을 속일 수 있나를 보여왔다. 그리고 색깔들이 동일하게 보여지게 만들어지는 방법도 보여왔다. 또 세가지 색깔들이 둘 또는 넷으로 읽혀질 수 있는 방법도 보여왔다. 알브스의 예술은 시각적으로 순수한 감동의 예술이고 또 비록 그것이 그것이 깜짝 놀라게 하거나 소란스럽게 하지는 않아도 bridget riley의 흑백 그림들이나 삽화들은 지각있는 심리학과 생리학의 입문서에서는 실례로서 주어진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들이 본질적인 특성은 시각적이거나 망막적인 예술이 그의 작업에 매우 만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으로 지금 언급되고 있다. Vasarely는 1935년 이래 고무들을 이용한 흑백 눈으로써 묘사했다는 것을 참조해 오고 있다. 이것들 가운데서 몇은 그의 서양 장기 조각들로 된 서양 장기판의 합성물이었다. 그리고 실체물 자체의 그림들은 줄무늬 형상들을 위한 전색제(용액)으로서 사용 되어진 호랑이들과 줄무늬 얼룩말들가 같은 것이다. 이전에 모든 그림들속에서, 그는 절단된 조화(리듬)와 기하학적인 양상들의 사용을 통하여 시각적인 모호함과 현란함을 고용해 왔다. 흑백 또는 색채 그리고 보다더 최근의 3차원의 입체가 있는 구조들은, 작품과 관람객의 사이에 친척관계가 되어야만 했던 Vasarely의 생각을 표현한 것이다. 그는 예술적인 작품의 출현에서 경험한다는 것은 그것을 이해한다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믿는다. 이해의 지적인 개념은 구경꾼에게 시각적 신체적인 영향을 준 그러한 정도에서 감각과 함께 포함되어진 예술의 영역에 빗나가게 된다. Vasarely는 예술가들의 행동에서 비인간화함을 밝혀냈다. 그는 예술 작품들이 모두에게 효력이 있어야 하고 그들의 단일성을 버려야 한다고 느낀다. 행동의 그의 자신의 분야에서까지 그는 많은 차원의 환각을 기초를 둔 예술 형식인 영화 예슬의 표현을 이용해 왔다. 활동적인 예술은 엄격한 의미에서 기계적인 운동의 사용을 암시하는 반면에 영화예술은 환각적이거나 실질상의 운동을 포함했다. 영화의 표현은 이외에도 Yaacov Agam의 작품에까지 적절하다고 여겨질수 있었다.<*특 히 융합시키고, 운동의 어떤 환상이 관람객이 활동 중이고 직업이 정지 되어 유지함으로써 개최되는 장소인 Cruz Diazd와 J.R. Sotod의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그들 앞에 한걸음 변화를 보인 양상들과 함께 물결 모양의 지면위에 그려진 그의 다형의 그림들  OP ART의 꼬리표는 예술가들을 위해 그들의 작품에 적용시키는 것은 불안정 하다. 결전적인 면에서 이론보다 차라리 기술을 포함시키는 범위에서는 표제 음악의 예술형식이 아니다. 중요한 이론들의 소수는 그들 자신들 예술가들에 의해서 충족되어졌다. 그리고 게다가 정밀하게 운동을 시작하고 끝맺는 장소에 대한 어떤 명확한 설계를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예를 들어 몇몇 활동적인 작품들을 사용함으로써 밝은 효과를 만들어 내게 되고 정확한 공간의 모호성을 만들어 내게 되었다. 종종 OP ART의 경계선에 대해 간단히 논하기도 한다. 파리 출신의 Derecherohed Art Visuel 단체는 기계적인 운동으로 뿐만 아니라 게다가 운동의 환각을 가지고 일한다. 운동의 양 유형의 고전적인 보기로서 1935년의 Duchamp의 Rotoreliefs를 들 수 있다. 투시 화법에서 운동의 환상을 생산한 원형의 디스크들은 축음기의 회전판에 놓여져 있었다.   스케일의 마지막 이외에도 OP ART의 경계선에서 하나의 읽기에서 부터 Ellswortu Kell의 흙 혼합물을 교환할 수 있는 화상인 다른 e․g 까지 변화를 주는 것이 형식적으로 너무도 모호한 그림들이 었다. 여기서 형식의 순수와 색깔의 특징적인 사용은 용모와 배경으로써 구경꾼에게 순수를 보여주게 한다. Kell의 그림들은 Peter sedgley와 Larry Poons의 형상 그림들과 같다. 그리고 Rich and Anuszkiewiez의 업적인 거짓의 인상은 보색들의 사용에 의해서 발생 되어졌고 강력한 뒷 이미지를 생산한다. 비록 이러한 그림들이 OP ART 운동에 아주 자연스럽게 속하는 것 같을지라도, 사람들은 기억해야만 한다. 예를 들어 Kelly가 시각적인 면에서 보다 차라리 그의 작업의 다른 면에서 논의 되어졌던 때와 동시에 이미 15C에 흙 혼합물에 그의 색채의 형상을 그림 그렸다는 것을 물론 이것은 Vasarely, Max Bill, Soto 그리고 Karl Gerstner 같은 사람들 이외에도 많은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에술가의 진실은 그들 각자의 순수성이 갑자기 1964년에 새로이 이름 지어진 경향에 가입하게 되었다.   OP ART의 특색안에서 일하고 있는 예술가들의 수는 매우 한정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매우 한정된 범주에 들어있는 그들사이에 있다. 이들은 물결무늬가 있는 양상들과 같은 효과를 탐험하는 사람들이다. (물실크 위에서 물결치는 아른거리는 빛의 형식처럼) 이것들은 들의 부정확이란 첨가나 더 이상의 평행선 또는 다른 반복하는 구조들로 부터 온 결과이다. 깊이와 운동의 환각으로 된 물결치는 선들의 거의 마술적인 효과들은 JR Soto, Gerald Oster, John Good Year, Ludwig Wilding과 Man Levinson에 의해 이용되어져 왔다. 가장 시각적으로 역동적인 작품은 Karl Gerald의 lens 그림들 같은 3차원의 구조들로 부터 분리한다. 그리고 Leroy Lamis와 Robert Stevnson의 환각주의자 유리 상자들은 완전히 불안정한 표면을 생산하는 것 같은 그러한 흑백 그림들이다. 이러한 분야에서 가장 차의력이 풍부한 화가는 Bridgef Riley이다. 그의 물결치는 길고 가느다라한 조각들과 다양한 형식적 발달은, 완성 된 그림속에서 규칙적으로 개발되어 온 직관적으로 생산된 양상들에 바탕을 두고 있다. 다른 예술가들 사이에서 그의 그림들은 기묘한 시각적인 교란을 생산한다. 그리고 애매모호한 것은 그가 축음기 회전반위에서 그린 것과 같은 중심의 원들은 위치를 만들어 낸 일본화가 Tadasky이다. 또한 두게들에게 변화를 주는 수평면이나 수직의 길고 가느다라한 조각들과 함께 추상적이고 본질적인 이미지를 창출해 내는 미국인 Julian Stanczak이다.  그들 작품들은 Gombrich가 기타 여러가지 원리들이라고 불렀던 것들에 작용한다.   마음이 신체적인 상황들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으로 속이게 되었던 상태가 창조 되어졌다. OP 그림들은 그들 자신들에게서 지적인 탐험을 주지는 않는다. - 그들의 장점은 격렬하게 관능적이고 종종 전통적인 자극의 영향이다. 그리고 그것은 최후로 독특한 경험도 이상도 아니고 이하도 될 수 없다는 것이다. 1966년        

  • Cubisme이 현대 회화에 끼친 영향

        큐비즘은 1907~14년에 걸쳐 파리를 중심으로 해서 전 세계적으로 확산된 藝術運動으로 1908년 마티스는 당시 조루주 브라크가 깜짝 놀랄만한 세잔느 풍의 그림을 보고난 후, 야수파에 마지막으로 매료된 브라크가 “단지 작은 튜브들만 구성된 그림을 그렸다고” 평론가 루이 보드셀에게 불평함으로 해서 큐비즘이라고 알려진 중대한 현상에 명칭을 부여하게 된다. 1908년 브라크는 실험적 노력, 충격적 에너지와 神적인 創造力을 지닌 피카소를 만나게 됨으로써 공동작업에 들어가게 된다. 이것이 바로 큐비즘이 거의 반세기 이상 현대 미술의 필수 불가결한 랑구아 프랑카(혼성국제어) 로 만들게 된 것이며, 이들 두 화가에 의해 르네상스 이래 100년간 지속 되어진 遠近法이 파괴되고 공간을 새로운 방식으로 재인식하게 된다.   큐비즘의 실험적인 방법에 의거하여 인간 지각의 빈틈없는 예민한 파악력을 반영함과 동시에 피카소와 브라크는 새로이 감지된 4차원 즉 시간을 적정된 회화의 세계로 도입한 것이다. 큐비즘은 그림의 여타 측면을 실현하기 위해 그 형상을 잘게 나누어 통일한 빠삐아 꼴레와 같은 평면적 구성으로 분할하기 시작함으로써 外的 實際의 법칙보다는 회화의 內的 法則에 더욱 충실한 구조로 그 단편들을 전환 시켰다. 이로써 브라크와 피카소는 큐비즘을 客觀的이고 構成主義的인 抽象의 형태로 전환 시키기 위한 단계를 만들어 나갔다. 그러나 야수파가 보다 주관적인 작가들의 순수한 색체 추상으로 확장하게끔 허용했듯이 큐비즘의 개척자들은 자신들의 예술이 감각적 세계와의 연관을 끊어 버리기에는 너무나 "人間的인 체취에 흠뻑 젖어 있음을 발견했다“ 그러므로 피카소와 브라크에 의한 큐비즘의 회화는 2차원적 표현 이라는 하나의 객체로서의 자율성과 3차원적 관찰 영역에 대한 암시 사이에서 배회하며 야수파의 낭만적 直觀에 대한 合理的이면서도 古典的인 代案으로서의 명성을 넘어 데 스틸의 유토피아적 열망에서 부터 초현실주의자 들의 정신적인 꿈에 이르는 모든것을 표현할 수 있는 유연성과 힘의 언어가 된다.     초기의 큐비즘은 꼴라쥬 기법으로 이루어진 레몬, 오이, 유리컵, 파이프 등의 까페 정물 장면에서 피카소는 짜여진 등나무 의자의 무늬가 인쇄된 유화 천조각을 부착 함으로써 전통적 방법을 사용함이 없이 의자의 존재를 시사해 주며 후에 피카소는 여기서 한발자욱 더 나아가 그의 꼴라쥬에 실제의 오브제나 오브제를 의미하는 오브제적 일부도 도입하게 된다. 이러한 기이한 착상은 큐비즘을 변형 시키게 되고 20세기 미술의 새로운 根源의 하나로 이루어 진다. 따라서 큐비즘은 오브제라는 새로운 미술 材料로써 이용되기 시작하여 1913~14년 동안에 수많은 화가들이 큐비즘의 문화로 들어오기 시작하여 오브제가 가지는 同時性에 대한 새로운 경향의 착상을 회화, 문학에도 적용시킨다. 이러한 전후인 15년경의 피카소의 걸작인 '테이블에 기대고 있는 남자'는 후기 “종합적 큐비즘"을 낳게되는 계기가 된다.     결론적으로 큐비즘은 20세기 미술에 화면의 平面性과 더불어 光에 의한 고유색의 발견과 20세기 미술의 사물에대한 直觀(선)을 부여하게 되며, 르네상스 이래로 쓰여져오던 空間性에 대한 문제인 遠近法의 파괴는 기존의 형태를 파괴하게 되므로 해서 自然에 대한 새로운 認識을 불러 일어키게 하였다. 또한 1907년 베르그송의 저서 ;창조력의 진화'를 통해 설파한 인간 기억의 축척적 특성 이라는 개념이나 12년에 아뽈리네르가 주장하는 ”신비주의적인 同時成에 대한 문제는 현대 재능있는 화가들이 달성하고자 하는 목표중의 하나로 이야기 되어진다.

  • 抽象彫刻의 發生에 관하여

      1.  抽象의 일반적 槪念     抽象이란 말은 라틴어에서 유래된 것으로 어떤 대상을 그 전체 상에서 생략, 제거, 정리하는 것을 抽象이라 한다. 즉 추상은 전체 상에 공통되는 특성을 요약, 발췌 독립시키거나 정비해 나가는 작용을 일컫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抽象이란 말이 美術에서 사용되기 시작한 정확한 때와 그 논거는 알 길이 없으나 대체로 1910년대에 이르면서 抽象, 抽象美術이란 말이 새로운 예술로서 언급되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抽象이란 의미가 美術에서 적용되는 것은 비구체적이고 애매모호 하다는 것이 그림 속의 대상에 관한 이야기 즉 그림 속에서 구체적이고 現實的인 대상이 떠오르지 않거나 지워졌을 경우 비구체적이요. 애매모호 하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나 抽象한다는 동사로 사용 될 경우 간추리고 정비해서 어떤 특성을 드러내 놓는다는 의미를 띄게 된다. 따라서 美術에서 적용되는 추상의 의미도 대체로 이 두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고 보아야 한다. 즉 비구체적이고 애매모호한 것으로서의 추상적인 것이 하나고 전체상 가운데 특수한 것을 간추려 낸다는 작용으로서의 抽象作業이 또 하나이다. 이러한 관념은 오랜 고래로 부터 소급되어 뚜렷한 틀이 잡힌 것은 르네쌍스기로 잡을 수 있다.    또다른 견해로 알프레드 바는 抽象을 동사와 명사로 구분하면 동사 to abstract는 <‥‥에서 추출해내는, 발라내는>을 의미하나, 명사 abstraction은 이미 <‥‥에서 발췌된 것,추출된 것>을 의미한다. 이 경우 피카소의 Cubism의 작품은 어떤 것에 추출해 내는 또는 발췌해 내는 동사로서의 to abstract에 상응되고 말레비치의 완전한 기하학적 사각형은 현실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으로 명사로서의 abstraction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抽象은 自然對象에 대한 관심과,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것은 캠버스란 표면과 화면에 대한 관심을 높여주는 것이 된다.따라서 抽象이란 말이 대상물의모방 복제에서 오는 애매모호함의 표현으로서와 대상물이 전혀 인식되지 않는 그러한 자연대상을 부정하는 추상적 이미지로 구분해서 살펴볼 수 있다. 초기의 추상화가들이 추상이란 말을 부정하고 구체란 말을 쓰기 좋아한 것은 대상물의 모방에서 오는 모호함이 抽象이라는 말로 통용 되었음에 온 것이라 할 수 있다.   H.Read의 견해에 따르면 事實的인 것과 抽象的인 것의 대극 대신 自然的인 것과 幾何學的인 것, 有機的인 것과 類型的인 것, 生命力的인 것과 形式主義的인 것으로 대립 시키고 있다. 寫實的인 것은 自然主義的,有機的 生命力的인 것으로 나타나고 抽象的인 것은 幾何學的, 有形的, 形式主義的인 것으로 나타난다고 하였다.    이러한 美術은 近代에 와서 등장한 것이 아니라 선사시대에서 부터 비롯된 장구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抽象的 의미는 自然主義的 상황과 더불어 시대와 지역을 초월한 보편적 요소로서 인류 美術史에 점철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면서 繪畵에서 抽象美術이라 하면 대체로 20세기에 들어오면서 특정한 경향을 가리키는 주장이 강하다. 이것은 아마 20세기 抽象美術이야 말로 현실적 대상을 화면에서 적극적으로 추방하려고 했던 분명한 의식이 대두 되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 한다.   2.  抽象樣式의 心理學的 근거   시각적인 영상은 의사전달 수단으로서 문자화 된 언어보다 선행하지만 정보의 전달을 위한 매체로서 美術이 일차적으로 관심을 두는 것은 아니다. 美術은 線 ,色彩, 形態 그리고 부피 등을 발견하고 형상화 하여 그것들이 미술가들에게는 중요한 무언가를 의미하는 뜻을 내포하게 한다. 기호를 글자화 하는 것에 반하여 美術은 그림을 그린다는 의미에서 표현을 전달하는 구성인 것이다. 美術의 材料와 技法은 美術家의 표현 양식이 된다. 즉 材料와 技法은 美術家의 創造 의도를 돕고 그 의도를 외적인 존재성을 부여해 줌으로서 美術家의 의도를 구체화 시킨다.     고 알베르트.자코메티(Alberto. Giacomatti 1901 - 1966)의 <가리키고 있는 사람>에서 우리는 타인으로 부터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소외되어 있는 한 個人의 고독이 彫刻에 의해 표현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인물의 신장, 신체 부분의 불명료함 가늘고 약한 형상, 이것의 일반적인 신체의 결핍 등은 우리가 개인과 어떤 개인적인 방식으로 관계를 맺기 위해 그와 의사를 소통하고자 할 때 부딪치는 어려움을 암시해 준다. 이러한 감정의 발견과 이것이 암시 할 人間에 관한 觀念의 발견은 美術이 어떻게 지극히 사적인 종류의 표현을 위한 매체가 될 수 있는가를 나타내 주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美術家가 주로 특정한 개인의 문제를 다룬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문제에 관하여 언급 한다고 볼 수 있다. 또한 心理學的 표현으로서의 미술에 흥미를 끄는 예로 조지 시걸 (George Segoall 924-)의 <식탁>을 보면 모델의 신체에 석회를 담근 천을 붙여서 彫刻 작품을 만들었다. 그의 작품의 형태는 彫刻이 깎여서 만들어지거나 붙여서 만들어 지는 경우에 나타날 수 있는 과장이나 단순화가 없는 살아 있는 형태의 복사가 된다.따라서 시걸은 그의 창조적인 역할을 평범한 상황 속에서의 평범한 인간을 확인하고 구성하는데서 찾았다. 또한 사랑에 대한 오귀스트.로뎅(Auguste Rodin)의 <키스>에서 보여주는 육체적 포옹에서 부터 메어리 캐서트(Mary Cassatt)의 <욕실>이 전달해 주는 모성애나 쟈콥.언스타인(Jacob.Eapspein)의 <마돈나와 아이>에서 나타난 모성적인 존귀함 까지 다양하게 취급된다. 또한 피카소의 조각인 <새끼 양을 안고 있는 양치기>에서는 인간애가 표현되고 있으며 마이욜은 그의 부조 작품인 <욕망>에서 성적 유혹의 고정적인 해석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여성의 모습은 보통 사랑과 성욕에 관한 폭 넓고 다양한 개인적 감정을 표현하는 출발점으로 사용된다.     장.아르프(Jean Arp 1887-1966)의 <토루소 게르브>에서 여성의 모습과 기능에 대한 궁극적인 추상화를 만나게 된다. 그의 彫刻에 있어서 거의 모든 인격적인 측면이 일종의 비인격적인, 성적 혹은 생물학적인 의미의 표현을 위해 거부되고 있다. 이는 생물학적으로나 심리학적으로 인간이라고 하는 것과의 관계를 잃지 않으면서 미술가가 갈 수 있는 한까지 유기적 형태를 추상화한 것이다. 그 외 죽음과 질병 영적인 관심등, 인간의 본성에 대한 인간 내적인 문제를 다룸으로서, 무형과 유형의 일치점을 찾고자 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3.  抽象彫刻의 近代的 기원    彫刻藝術의 출발은 建築과의 긴밀한 관계에서 형성되었고 전개 되었다. 建築과 대등한 관계가 아니라 建築의 종속에서 거의 벗어나지 못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彫刻藝術이 그 독자저인 영역을 되찾기 시작한 것은 르네상스 시대에 와서 어너정도 그 기운이 보이다가 18세기 경에 와서야 建築과의 관계에서 벗어나 독립된 존재로서 다루어지기 시작 하였다.   彫刻은 그리스 시대 이래로 建築과 더불어 造形藝術의 가장 중심적 장르로 인식되어 왔으나 르네상스를 지나면서 17-8세기에 와서 그 자리를 繪畵에 물려주는 침체현상을 드러내 주었다. 따라서 19세기로 이어지는 이 몇 세기를 두고 繪畵가 위대했던 시대라 부르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자연히 彫刻의 발전이 繪畵의 그것에 종속되는 형국을 빚어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세기의 로뎅과 그의 뒤를 이은 부르델의 출현은 彫刻藝術의 눈부신 부흥을 가져온 것이었다. 그러나 繪畵에 있어 새로운 주의 주장, 이즘의 만개를 가져 왔으며 보다 자유로운 표현의 열려진 국면을 갖고 있는 상황에 비하면 彫刻은 여전히 닫혀진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한 인상을 주고 있다. 그것은 彫刻이 지닌 주제와 소재의 한계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참다운 彫刻의 변혁은 주제와 소재와 기법의 革新에서 찾아가지 않으면 안되었다.이 최초의 운동이 1910년대의 미래파 운동에서 나타나기 시작 하였다. 彫刻의 혁신은 전통적으로 사용해 왔던 재료를 벗어나 새로운 재료의 적극적 도입에서 비롯된다.   새로운 소재는 필연적으로 새로운 형태를 유도하게 된다. 따라서 抽象彫刻의 출발은 未來派의 構成主義에서 출발 점차 幾何學的, 構造的 抽象으로 발전되어간 타틀린, 페브스너등을 중심으로한 러시아 構成主義와 有機的 생명주의적 形態에서 출발,브랑쿠시,아르프,헨리무어 등으로 이어지는 순수 抽象으로 이러는 길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910년대 초 러시아는 抽象繪畵의 실험무대 뿐만 아니라 抽象彫刻의 실험무대로서도 활발한 상황을 펼쳐 보였다. 抽象의 불꽃은 未來派의 러시아 상륙에서 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1909년 未來派 선언이 발표 되면서 1913년 화가 였던 타틀린이 파리로 여행하면서 보치오니의 작품에 감화를 받고 피카소를 방문 새로운 藝術에 대한 신뢰를 갖고 모스코바로 돌아오면서 바로 抽象的 오브제를 제작하기 시작 하였으며.    1914년에 말레비치가 절대주의를 제창 하였으며, 이러한 새로운 미술에 대한 소용돌이 속에서 構成主義로 발전되어 갔으며 1817년 혁명직후 가보 페브스너 형제와 타틀린,말레비치,칸딘스키 등의 활동은 일찍이 이곳을 중심으로 抽象美術의 화려한 전개가 약속된 듯 했다. 이러한 抽象美術의 활발한 전개는 1920년 타틀린의 선언문이 抽象彫刻의 지침을 보는 듯한 내용으로 점철 되었다.*   이것은 量에 의하지 않은 彫刻은 새로운 재료에 의한 공간탐구의 방법론을 유출하였으며. 여기에서 抽象彫刻의 길은 열리게 된다.    空間의 탐구와 더불어 시간성의 도입은 抽象彫刻의 가장 괄목할만한 방법의 변혁을 초래하였다. 움직임과 동력의 적극적인 개입은 오랜 彫刻의 정적 고체적 개념을 타파한 것이 되었다. 이러한 움직임은 未來派에서도 시도된 바 있으나 이것은 움직이는 것과 움직임 그 자체밖에 조형적 재현을 바랬을 뿐이다. 따라서 그 실험은 기록으로서의 가치, 특히 주의로서의 가치밖에 지니지 못한 것이 되었다. 그러나 抽象彫刻은 움직임 그 자체가 바로 소재가 되어 버렸다는 점이다. 또한 유기적, 생명주의적 彫刻은 브랑쿠시에서 본질적인 抽象畵의 방법을 열어 보였고 그의 形態는 일반적 抽象畵의 構成으로서의 단순화라 보기보다는 대상의 표면에서 내면에로 점차적으로 이동해 나가는 과정에서 획득된 산물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경계 영역의 繪畵는 繪畵와 일상의 경계 이것의 모호함은 물론이려니와 繪畵와 彫刻이라는 전통적인 장르의 파괴와 상호 침투현상으로서도 나타났다. 이러한 현상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심화되어 70년대에 이르러서는 전통적인 장르개념 대신에 새로운 평면과 입체 또는 오브제 등으로 불리게 된 것에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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