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抽象彫刻의 發生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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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抽象의 일반적 槪念

 

  抽象이란 말은 라틴어에서 유래된 것으로 어떤 대상을 그 전체 상에서 생략, 제거, 정리하는 것을 抽象이라 한다. 즉 추상은 전체 상에 공통되는 특성을 요약, 발췌 독립시키거나 정비해 나가는 작용을 일컫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抽象이란 말이 美術에서 사용되기 시작한 정확한 때와 그 논거는 알 길이 없으나 대체로 1910년대에 이르면서 抽象, 抽象美術이란 말이 새로운 예술로서 언급되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抽象이란 의미가 美術에서 적용되는 것은 비구체적이고 애매모호 하다는 것이 그림 속의 대상에 관한 이야기 즉 그림 속에서 구체적이고 現實的인 대상이 떠오르지 않거나 지워졌을 경우 비구체적이요. 애매모호 하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나 抽象한다는 동사로 사용 될 경우 간추리고 정비해서 어떤 특성을 드러내 놓는다는 의미를 띄게 된다. 따라서 美術에서 적용되는 추상의 의미도 대체로 이 두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고 보아야 한다. 즉 비구체적이고 애매모호한 것으로서의 추상적인 것이 하나고 전체상 가운데 특수한 것을 간추려 낸다는 작용으로서의 抽象作業이 또 하나이다. 이러한 관념은 오랜 고래로 부터 소급되어 뚜렷한 틀이 잡힌 것은 르네쌍스기로 잡을 수 있다. 

  또다른 견해로 알프레드 바는 抽象을 동사와 명사로 구분하면 동사 to abstract는 <‥‥에서 추출해내는, 발라내는>을 의미하나, 명사 abstraction은 이미 <‥‥에서 발췌된 것,추출된 것>을 의미한다. 이 경우 피카소의 Cubism의 작품은 어떤 것에 추출해 내는 또는 발췌해 내는 동사로서의 to abstract에 상응되고 말레비치의 완전한 기하학적 사각형은 현실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으로 명사로서의 abstraction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抽象은 自然對象에 대한 관심과,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것은 캠버스란 표면과 화면에 대한 관심을 높여주는 것이 된다.따라서 抽象이란 말이 대상물의모방 복제에서 오는 애매모호함의 표현으로서와 대상물이 전혀 인식되지 않는 그러한 자연대상을 부정하는 추상적 이미지로 구분해서 살펴볼 수 있다. 초기의 추상화가들이 추상이란 말을 부정하고 구체란 말을 쓰기 좋아한 것은 대상물의 모방에서 오는 모호함이 抽象이라는 말로 통용 되었음에 온 것이라 할 수 있다.

  H.Read의 견해에 따르면 事實的인 것과 抽象的인 것의 대극 대신 自然的인 것과 幾何學的인 것, 有機的인 것과 類型的인 것, 生命力的인 것과 形式主義的인 것으로 대립 시키고 있다. 寫實的인 것은 自然主義的,有機的 生命力的인 것으로 나타나고 抽象的인 것은 幾何學的, 有形的, 形式主義的인 것으로 나타난다고 하였다. 

  이러한 美術은 近代에 와서 등장한 것이 아니라 선사시대에서 부터 비롯된 장구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抽象的 의미는 自然主義的 상황과 더불어 시대와 지역을 초월한 보편적 요소로서 인류 美術史에 점철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면서 繪畵에서 抽象美術이라 하면 대체로 20세기에 들어오면서 특정한 경향을 가리키는 주장이 강하다. 이것은 아마 20세기 抽象美術이야 말로 현실적 대상을 화면에서 적극적으로 추방하려고 했던 분명한 의식이 대두 되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 한다.

 

2.  抽象樣式의 心理學的 근거

  시각적인 영상은 의사전달 수단으로서 문자화 된 언어보다 선행하지만 정보의 전달을 위한 매체로서 美術이 일차적으로 관심을 두는 것은 아니다. 美術은 線 ,色彩, 形態 그리고 부피 등을 발견하고 형상화 하여 그것들이 미술가들에게는 중요한 무언가를 의미하는 뜻을 내포하게 한다. 기호를 글자화 하는 것에 반하여 美術은 그림을 그린다는 의미에서 표현을 전달하는 구성인 것이다. 美術의 材料와 技法은 美術家의 표현 양식이 된다. 즉 材料와 技法은 美術家의 創造 의도를 돕고 그 의도를 외적인 존재성을 부여해 줌으로서 美術家의 의도를 구체화 시킨다.

 

  고 알베르트.자코메티(Alberto. Giacomatti 1901 - 1966)의 <가리키고 있는 사람>에서 우리는 타인으로 부터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소외되어 있는 한 個人의 고독이 彫刻에 의해 표현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인물의 신장, 신체 부분의 불명료함 가늘고 약한 형상, 이것의 일반적인 신체의 결핍 등은 우리가 개인과 어떤 개인적인 방식으로 관계를 맺기 위해 그와 의사를 소통하고자 할 때 부딪치는 어려움을 암시해 준다. 이러한 감정의 발견과 이것이 암시 할 人間에 관한 觀念의 발견은 美術이 어떻게 지극히 사적인 종류의 표현을 위한 매체가 될 수 있는가를 나타내 주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美術家가 주로 특정한 개인의 문제를 다룬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문제에 관하여 언급 한다고 볼 수 있다. 또한 心理學的 표현으로서의 미술에 흥미를 끄는 예로 조지 시걸 (George Segoall 924-)의 <식탁>을 보면 모델의 신체에 석회를 담근 천을 붙여서 彫刻 작품을 만들었다. 그의 작품의 형태는 彫刻이 깎여서 만들어지거나 붙여서 만들어 지는 경우에 나타날 수 있는 과장이나 단순화가 없는 살아 있는 형태의 복사가 된다.따라서 시걸은 그의 창조적인 역할을 평범한 상황 속에서의 평범한 인간을 확인하고 구성하는데서 찾았다. 또한 사랑에 대한 오귀스트.로뎅(Auguste Rodin)의 <키스>에서 보여주는 육체적 포옹에서 부터 메어리 캐서트(Mary Cassatt)의 <욕실>이 전달해 주는 모성애나 쟈콥.언스타인(Jacob.Eapspein)의 <마돈나와 아이>에서 나타난 모성적인 존귀함 까지 다양하게 취급된다. 또한 피카소의 조각인 <새끼 양을 안고 있는 양치기>에서는 인간애가 표현되고 있으며 마이욜은 그의 부조 작품인 <욕망>에서 성적 유혹의 고정적인 해석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여성의 모습은 보통 사랑과 성욕에 관한 폭 넓고 다양한 개인적 감정을 표현하는 출발점으로 사용된다.

 

  장.아르프(Jean Arp 1887-1966)의 <토루소 게르브>에서 여성의 모습과 기능에 대한 궁극적인 추상화를 만나게 된다. 그의 彫刻에 있어서 거의 모든 인격적인 측면이 일종의 비인격적인, 성적 혹은 생물학적인 의미의 표현을 위해 거부되고 있다. 이는 생물학적으로나 심리학적으로 인간이라고 하는 것과의 관계를 잃지 않으면서 미술가가 갈 수 있는 한까지 유기적 형태를 추상화한 것이다. 그 외 죽음과 질병 영적인 관심등, 인간의 본성에 대한 인간 내적인 문제를 다룸으로서, 무형과 유형의 일치점을 찾고자 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3.  抽象彫刻의 近代的 기원 

  彫刻藝術의 출발은 建築과의 긴밀한 관계에서 형성되었고 전개 되었다. 建築과 대등한 관계가 아니라 建築의 종속에서 거의 벗어나지 못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彫刻藝術이 그 독자저인 영역을 되찾기 시작한 것은 르네상스 시대에 와서 어너정도 그 기운이 보이다가 18세기 경에 와서야 建築과의 관계에서 벗어나 독립된 존재로서 다루어지기 시작 하였다.

  彫刻은 그리스 시대 이래로 建築과 더불어 造形藝術의 가장 중심적 장르로 인식되어 왔으나 르네상스를 지나면서 17-8세기에 와서 그 자리를 繪畵에 물려주는 침체현상을 드러내 주었다. 따라서 19세기로 이어지는 이 몇 세기를 두고 繪畵가 위대했던 시대라 부르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자연히 彫刻의 발전이 繪畵의 그것에 종속되는 형국을 빚어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세기의 로뎅과 그의 뒤를 이은 부르델의 출현은 彫刻藝術의 눈부신 부흥을 가져온 것이었다. 그러나 繪畵에 있어 새로운 주의 주장, 이즘의 만개를 가져 왔으며 보다 자유로운 표현의 열려진 국면을 갖고 있는 상황에 비하면 彫刻은 여전히 닫혀진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한 인상을 주고 있다. 그것은 彫刻이 지닌 주제와 소재의 한계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참다운 彫刻의 변혁은 주제와 소재와 기법의 革新에서 찾아가지 않으면 안되었다.이 최초의 운동이 1910년대의 미래파 운동에서 나타나기 시작 하였다. 彫刻의 혁신은 전통적으로 사용해 왔던 재료를 벗어나 새로운 재료의 적극적 도입에서 비롯된다.

  새로운 소재는 필연적으로 새로운 형태를 유도하게 된다. 따라서 抽象彫刻의 출발은 未來派의 構成主義에서 출발 점차 幾何學的, 構造的 抽象으로 발전되어간 타틀린, 페브스너등을 중심으로한 러시아 構成主義와 有機的 생명주의적 形態에서 출발,브랑쿠시,아르프,헨리무어 등으로 이어지는 순수 抽象으로 이러는 길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910년대 초 러시아는 抽象繪畵의 실험무대 뿐만 아니라 抽象彫刻의 실험무대로서도 활발한 상황을 펼쳐 보였다. 抽象의 불꽃은 未來派의 러시아 상륙에서 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1909년 未來派 선언이 발표 되면서 1913년 화가 였던 타틀린이 파리로 여행하면서 보치오니의 작품에 감화를 받고 피카소를 방문 새로운 藝術에 대한 신뢰를 갖고 모스코바로 돌아오면서 바로 抽象的 오브제를 제작하기 시작 하였으며. 

  1914년에 말레비치가 절대주의를 제창 하였으며, 이러한 새로운 미술에 대한 소용돌이 속에서 構成主義로 발전되어 갔으며 1817년 혁명직후 가보 페브스너 형제와 타틀린,말레비치,칸딘스키 등의 활동은 일찍이 이곳을 중심으로 抽象美術의 화려한 전개가 약속된 듯 했다. 이러한 抽象美術의 활발한 전개는 1920년 타틀린의 선언문이 抽象彫刻의 지침을 보는 듯한 내용으로 점철 되었다.*

  이것은 量에 의하지 않은 彫刻은 새로운 재료에 의한 공간탐구의 방법론을 유출하였으며. 여기에서 抽象彫刻의 길은 열리게 된다. 

  空間의 탐구와 더불어 시간성의 도입은 抽象彫刻의 가장 괄목할만한 방법의 변혁을 초래하였다. 움직임과 동력의 적극적인 개입은 오랜 彫刻의 정적 고체적 개념을 타파한 것이 되었다. 이러한 움직임은 未來派에서도 시도된 바 있으나 이것은 움직이는 것과 움직임 그 자체밖에 조형적 재현을 바랬을 뿐이다. 따라서 그 실험은 기록으로서의 가치, 특히 주의로서의 가치밖에 지니지 못한 것이 되었다. 그러나 抽象彫刻은 움직임 그 자체가 바로 소재가 되어 버렸다는 점이다. 또한 유기적, 생명주의적 彫刻은 브랑쿠시에서 본질적인 抽象畵의 방법을 열어 보였고 그의 形態는 일반적 抽象畵의 構成으로서의 단순화라 보기보다는 대상의 표면에서 내면에로 점차적으로 이동해 나가는 과정에서 획득된 산물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경계 영역의 繪畵는 繪畵와 일상의 경계 이것의 모호함은 물론이려니와 繪畵와 彫刻이라는 전통적인 장르의 파괴와 상호 침투현상으로서도 나타났다. 이러한 현상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심화되어 70년대에 이르러서는 전통적인 장르개념 대신에 새로운 평면과 입체 또는 오브제 등으로 불리게 된 것에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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